돌아왔다능 😂
오랫동안 사용했던 블로그 계정이 통으로 날아갔다. 정확히는 블로그를 소흘히 하는 동안 Blogger, (구)Blogspot이 구글에 통합되면서 더 이상 Gmail 계정이 아니고서야 로그인 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원래 블로그는 2010년 잠깐 미국에 돌아가 있는 동안 만들었던 2집의 작업일지를 위한 공간이었다. 내 성격에 아마 당시에도 글 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고 무탈한듯 포장하려 노력했겠지만 2집을 만들며 겪었던 에피소드들이라던지, 사귄지 1년도 안된 여자친구 (현)아내와 떨어져있는 동안 느꼈던 외로움, 그리고 멀리서 나 없이도 잘 돌아가던 홍대를 지켜보며 커졌던 초조함이 군데군데 묻어있을 젊은 시절의 기록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팀베이비가 나온 뒤 부터는 전부 비공개로 돌리긴 했지만.
2008년 만나이 스물다섯에 나름 큰 기대를 품고 고국에 돌아왔었다. 비록 내가 갈망했던 것에 비해서는 보잘것 없는 반응이었지만 실망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항상 불안을 안고 사는 나에게도 작은 인기는 가끔씩 영원할 것 같은 순간들을 안겨주었다. 클럽들을 돌며 매주 커다란 환호와 때창에 휩싸여 무대를 내려올때면 함께 무대를 나누던 밴드들에 대한 애정도 같이 깊어졌는데, 사실 그들의 음악보다도 함께 있을때 느끼던 소속감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었다. 나와 밴드들이 속해있는 소속사는 나에게 집이었고, 가족이었다. 배경만 좀 다르지 나와 같은 부족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바램이었다. 2세대 인디락 부활 대축제 같던 시기에도 고작 500명 남짓의 팬덤을 돌려가며 굴러가던 홍대씬에 나는 뿌리없는 이방인일 뿐이었고, 새친구들을 잔뜩 사귀어 들떠있었을뿐, 따지고 보면 이곳에 다시 초대받은 적도 없었다.
활활 타오를 것 같던 우리 부족의 불은, 검정치마 데뷔 1년만에 한강둔치에서 날리는 폭죽보다 조용하고 빠르게 꺼졌다. 살면서 처음 맛보는 배신감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난 거의 매일 찔끔찔끔 눈물을 쏟거나 여자친구 집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들어있었다. 자본이 없으니 당장 노래들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다음 앨범은 내게 먼 미래의 얘기일 뿐이었다. 데뷔 후 수만장이 팔려나갔다는 앨범은 그동안 한번도 정산을 받은적이 없었고, 아무런 페이도 없이 일주일에 두세번씩 클럽을 가득 채워 공연을 했다. 가끔 지방을 가거나 대표의 기분이 엄청 좋은 날에는 밴드당 50만원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전혀 불만이 없을 정도로 멍청했고, 인디음악이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한번은 EBS 공감 녹화가 있던날 대표에게 돈 얘기를 꺼내는 베이스 멤버의 멱살을 잡고 내음악이 파는 물건처럼 보이냐며 병신같이 쌩쑈를 했다 (똑똑한 친구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그런 우릴 실실 웃으며 쳐다보던 대표 멱살을 잡았어야 되는데 당시에는 진짜 너무 어리고 멍청했다.
다행히 소속사에 있던 다른 밴드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탈퇴를 주도한 덕분에 검정치마도 같은 시기에 계약을 해지 할 수 있었고, 201의 판권을 되찾은 뒤에는 디지털 음원에 대한 소액의 돈도 돌려 받았다. 데뷔후 처음이자 마지막 정산이었고, 내 다음 앨범과 미국에서의 월세를 10개월 정도 커버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커리어 초반에 이런 큰 인생레슨을 받을수 있었던게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은 아닐꺼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 그전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깊게 생겼달까. 만약 내 홍대 정착기가 순탄했다면 데뷔이후의 음악적 행보는 지금과는 매우 달랐을것이다. 불합리한 계약 일지언정 지금까지 같은 소속사를 유지했을것임은 물론이고.
일이 있고 난 후 미국으로 돌아가기 한달 남짓 남았을때, 처음으로 공황발작을 겪었다. 퇴근길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던 도중 갑자기 승객들이 나를 째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들이 나를 칼로 난도질 할 것 같다는 망상 때문에 숨쉬는게 점점 어려워졌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여자친구가 눈치 빠르게 입고있던 코트를 풀어 벌려준 덕분에 나는 내 키 반만한 여자친구 코트속에 머리를 끝까지 쳐박은채 숨쉬는 방법을 까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밖을 내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이후로 불행하게도 난 미국에서 2집을 끝낼때까지 크고 작은 패닉어택을 자주 겪었다. 미국에 돌아갔을 때가 아마 4월쯤이었다. 한동안은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나고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으며 기분전환을 했다. 블로그에는 새로 산 디지털 카메라로 월세집 사진도 올리고, 장보고 드라이브를 다니는 일상도 공유했다. 한국으로부터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탓에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온 공황발작 때문에 한동안은 음식을 삼킬때마다 목에 음식이 걸려 질식사 할 것 같다는 공포에 시달렸었다. 햇반 하나를 풀이 될 정도로 끓여 사흘동안 나눠 먹기도 했다. 결국에는 괜찮아졌지만.
그럼에도 녹음은 시작 할 수 밖에 없었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앨범이 한창 진행중에 있을때 녹음을 도와주던 친구와 다투는 일이 있었고, 그는 여태까지 우리가 녹음해온 파일이 담긴 하드를 인질로 잡아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가뜩이나 정신상태가 불안했던 나는 얘를 발견하는 즉시 야구빠따로 뚜드려 때릴 계획을 세웠었다 (당시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징징대던 나를 보러 마침 한국에서부터 날아 온 여자친구와는 매일 녹음실 근처에 100만원짜리 폐차직전의 미니밴을 주차해놓고 둥굴레 차를 마시며 잠복수사를 했다. 결국엔 화해 아닌 화해(?)를 통해 녹음을 재개하고 무사히 앨범 발매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 그러기에는 음악의 내용은 물론, 만드는 과정까지 배신이라는 키워드에 잠식되어 버린 앨범이 나와버렸다. 한편으로는 가삿말에 너무 날을 세워서 카르마의 벌을 받는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2집은 출국을 앞두고 굉장히 짦은 시간동안에 만든 노래들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멜로디 보다는 가사를 위주로 작곡했기 때문에 작곡적으로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여유가 없었던 관계로 앨범에 담아내지 못한 디테일들은 지금까지도 내 귓가에만 남아 멤돈다. 앨범의 속내와 작업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듣는 2집은 그 헐벗음이 나름의 매력으로 작용하겠지만, 나에게는 동반된 모든 기억들이 쓰리기만 하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와중에도 '어, 괜찮음. 나 이거 그냥 수영하는거임' 하고 태연하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 불가능 하다면 적어도 노래에서 만큼은.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2집 활동을 하면서도 블로그는 꾸준히 썼었다. 2집 활동을 마무리 하고 나서부터는 사람들이 내 소식을 확인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며 얻는 기쁨도 있었다. 그러다 약 10년전(시간이 이렇게 빠르다) 힙스터가 얼마나 웃긴건지에 대해 쓴 글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처음으로 이곳도 내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던것 같다. 가끔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가볍게 일기를 쓰고 싶은데 뭐가 부끄러운지 매번 지우고 만다.